
언제든 한번이라도
by.울컥걸
성화는 이런 일을 겪기엔 너무 어른이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성화가 지금 적잖이 당황했음을 뜻했다. 난 그냥 온천 호텔에 휴가 온 직장인인데? 이런 일은 만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에게 적당한 용기를 선물로 주고 싶을 때 신이 내리는 퀘스트 같은 거 아니야?
여름 휴가가 멀지 않은 시기였다. 그리 크지 않은 회사의 모든 구성원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 연차를 쓰는 말단 사원. 간에 바람을 넣어 최대한 부풀린 성화가 비장한 표정으로 토독토독 키보드를 두드렸다. 성실하고 군말 없는 박성화. 쉽게 흔들리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박성화. 그러나 오늘 성화는 성화답지 않았다. 자신이 보낸 업무용 카톡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는 상사의 눈빛은 꼭 이 휴가가 끝나고 네가 돌아올 자리는 없다고 말하는 거 같았지만 성화는 그 눈빛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바다도 계곡도 친구들도 가족과도 떨어져 홀로 뜨끈하게 온천에 몸 좀 담구다 오겠습니다. 다녀오면 일도 더 잘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진 않았다. 말했음 정말로 잘렸을 것이다. 이럴 땐 적당히 사연 있는 표정을 짓는 게 더 잘 먹혔다. 물론 성화가 연기를 잘한다는 뜻은 아니다. 상사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으니까. 사실 진짜 진지한 사연이 있었어도 별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사연은 누구나 가진 것이라 헐값이다.
開.
“꼭 컴퓨터 그래픽 같다.”
혼잣말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성화가 한 것이라고는 호텔 앞 산책로를 올라가다 옆에 수상하게 온천이라고 한자로 적힌 나무 푯말이 가리키는 길로 10분쯤 걸은 것뿐이다. 사람들이 한 명도 지나가지 않는데 발이 딛는 길은 돌들이 가지런히 깔려 있었다. 둥글고 각지지 않은 콩돌들이 성화의 얇은 쪼리 바닥과 발 사이에서 부드럽게 밟혔다. 야외에도 온천이 있나 봐. 걸으면 걸을수록 멀리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길 양옆으로 심어진 모죽이 바람에 맞춰 흔들렸다. 호텔 안에서 줄곧 보던 녹음이 울창한 산과는 또 달랐다. 근데 이 정도로 꾸며 놓은 노천탕이면 홈페이지에서 홍보할 법도 한데.
이유 없는 기대감을 품은 채 성화는 계속 걸었다. 양옆과 길의 모양이 쭈욱 똑같은 데다 희한하게 어디서 부는지 모를 뜨뜻한 바람이 계속 불어오자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상하게 걸음이 멎지를 않았다. 등 뒤에서 무언가 부드럽게 앞으로 가라며 떠미는 기분이었다. 성화는 그대로 공중에서 한 발을 뻗었다. 그리고 곧 모든 것이 변했다.
성화는 이런 일을 겪기엔 너무 어른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은 현기증을 부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발을 한 발 내딛자마자 처음 보는 붉고 높은 건물 앞에 멈춰서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성화가 밟은 것은 분명 돌길이었는데 뒤를 보니 졸졸 흐르는 개천 위에 돌로 된 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게 아닌데? 성화는 외마디 소리를 지를 정신도 없이 뒤로 돌아 뛰었다. 그렇지만, 돌아서 뛴다고 해서 호텔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애초에 그 요상한 푯말이 눈에 띄었을 리가 없다. 정말 이상한 것들은 이상해 보이지 않다가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야만 제 정체를 드러낸다. 성화는 다리 위를 한참 달렸지만 도무지 반대쪽 끝에는 닿을 수가 없었다. 런닝머신 위를 뛰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발이 계속 헛돌았다. 이거 쓸모없는 짓이구나. 성화는 결국 멈춰 섰다. 이마 위로 식은땀이 쏟아졌다. 이제 책이나 만화에서 본 대로 누구 계세요? 하다가 괴물 만나서 죽는 거야? 성화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건물 쪽으로 돌았다. 양 옆구리에 바짝 붙인 손으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싸움은 해봐야 아는 거야. 눈 떴는데 해볼 만 하다 싶으면 주먹으로 쇼부 본다. 포부가 거창했다.
“뭐해?”
웬 두꺼비가 말을 걸기 전까지 성화는 분명 거의 나루토였다. 아니 좀 패볼 만한 게 나와야 싸움을 하지. 성화는 자신이 아무리 비상식적인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자신보다 작은... 두꺼비 같은 걸 때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옷 입고 사람 말을 하는 두꺼비라면 때려도 되지 않을까. 성화는 이미 충분히 정신이 나갈 거 같았다. 모럴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뭐하냐니깐. 손은 왜 그렇게 떨어?”
“뭐.. 뭐?”
“심지어 바보네. 얼른 들어가. 곧 영업 시작이야.”
“영업?”
“머리 다쳤어?”
“?”
“... 너 뭐야. 인간이야?”
두꺼비가 하루아침에 여기 떨어진 성화보다 더 놀란 얼굴을 하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성화는 뭐 별 도움닫기도 안 한 거 같은데 턱 밑까지 튀어 오르는 커다랗고 통통한 두꺼비를 보며 아까 정신이 나간 채 두꺼비를 때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영업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다. 세상에 말하는 두꺼비 테마파크도 있다니.
인간이야 인간! 인간이라고! 두꺼비는 목소리가 너무 컸다. 성화는 버퍼링이 걸린 머리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쳤다. 생각해 박성화, 생각. 선택지는 없었다. 성화는 제자리에서 연거푸 팔짝팔짝 뛰어오르며 소리를 지르는 두꺼비의 입을 틀어막은 채 지나갈 수 없는 다리 쪽 대신 붉은 건물 쪽으로 뛰었다.
괴물들도 자동문을 쓰는지 아주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던 나무문이 앞에 서자 스르륵 열렸다. 붉은 건물의 내부는 건물 밖에서 굴뚝으로 슬슬 피어오르던 연기, 하나 둘 켜지는 불로 보던 것과는 또 달랐다. 밖에선 그리 커 보이지 않았던 건물의 1층은 아주 넓었으며 온갖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했다. 내가 지금 보는 게 옷 입은 너구리랑 말하는 수달이랑 카운터 보는 곰이 맞지? 성화는 두꺼비를 옆구리에 낀 채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귀여운데 무서워!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어떻게든 진정해보려는 마음에 크게 심호흡을 하자 각자의 일로 부산스럽던 공간이 순간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얼어붙었다.
“인간이야?”
“인간?”
“인간 맞아. 냄새가 나.”
“얼른!”
“얼른 알려야 해!”
…님께. 각자 한마디씩 하느라 소란스럽던 공간이 순간 다시 적막해졌다. 적막해진 것이라고 보기엔 왠지 엄숙한 공기가 흐르고, 한데 뭉쳐있던 동물들의 한 가운데가 어떤 종교의 기적처럼 쭉 갈라지며 길이 났다. 희한하게 그 길에서 아까 걸어올 때 불었던 바람이 느껴졌다. 성화는 순간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어느새 옆구리에 끼고 있던 두꺼비가 주르륵 흘러내려 중앙으로 난 길을 폴짝폴짝 뛰어갔다. 그리고 곧 그 길에서 등장한 것은 집채만한 호랑이도 검은색 괴물도 마녀도 난쟁이도 아니었다. 그냥 염색한 빨간 머리에 (응?) 피어싱이 달린 귀에 (응?) 타이다이 스타일로 염색된 품이 커다란 티셔츠와 (응?) 반바지를 입고 스마트폰을 든 젊은 남자였다. 엥? 성화는 궁금증이 담긴 외마디 소리를 마지막 한 가닥 남은 이성으로 간신히 갈무리했다. 뭐야. 동물들은 다 무슨 전통의상 같은 거 입고 있는데. 저 사람도 사람인가? 하지만 잡혀 왔다고 보기엔 너무 익숙하게 그 이상한 공간 안을 걷는 게 이상했다.
“홍중 님!”
“왜.”
“문 앞에 저 인간이 있었습니다. 보고 드려야 할 거 같아서 제가 잡아 왔어요!”
“잡아 온 거 맞아?”
에이, 아까 보니까 저 인간 옆구리에 납작하게 끼어있던데. 홍중이라고 불린 남자의 입에서 장난스러운 말투의 한국어가 나오자 성화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홍중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움직여도 된다고 한 적 없는데?”
성화의 얼굴 앞으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성화의 이마 위로 덮여 있던 앞머리가 뒤로 날리고 눈 깜짝할 사이 홍중이 성화 바로 앞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평소에 영화 많이 봐?”
“네?”
“인간들 영화 보면 이런 곳 함부로 들어오면 못 나가잖아. 알지?”
“…?”
“너도 못 나가. 이건 약간 클리셰 같은 거라.”
받아들여. 그래도 일은 시켜 줄게. 아무 스펙도 안 보고 바로 고용이라니 나 너무 착한 거 같아. 성화는 갑자기 입력된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댔다. 아니 나 나가야 하는데? 근데 근로 계약서는? 월급은? 성화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중은 성화의 훤히 드러난 이마 위에 검지 손가락 하나를 올리고 지긋이 눌렀다.
“이름이 뭐야?”
“박성화.”
“... 성화?”
성화야, 이제 넌 성도 이름 끝 자도 없는 거야. 성아. 꼭 아명처럼 들리는 한 음절의 동글동글한 소리. 홍중의 목소리가 다정해서 성화는 왠지 아주 어릴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눈에 물기가 한가득 차올랐고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이는 홍중의 두 눈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성화는 그 순간 왜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回.
붉은 건물은 온천 겸 숙박시설인 것 같았다. 근데 손님이 온 동네 산짐승들이었다. 성은 3층의 작은 열탕 하나를 맡았다. 성에게 일을 가르쳐 주는 선임은 없었으나 이상하게 카운터에서 물을 대는 패를 받는 일이 익숙했다. 아주 커다란 멧돼지 손님이 나간 후 성은 자연스럽게 카운터를 찾아가 손가락으로 패를 가리켰다. 카운터의 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성에게 패를 한움큼 내밀었다. 낭비하면 안돼.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자상했다. 성은 그 자상한 목소리에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근데 저, 혹시 직원 숙소는 어디에요?”
“숙소?”
“네. 숙소요.”
“숙소는 없어. 다들 퇴근하면 자기 집으로 가지. 우린 정해진 시간만 일한다고.”
아니 이게 무슨 9 to 6 같은 소리인지. 성화는 멍해졌다. 아니 그럼 집이 없는 사람.. 아니 동물은요?
“집이 없는 동물이 어디 있어.”
나 사실은 죽어서 천국에 왔나? 정시 퇴근과 내집마련이 당연한 걸 보니 이 세상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성은 취한 거 같은 기분으로 자신의 탕에 돌아와 고압 스팀으로 탕 안을 깨끗이 닦았다. 다음 손님은 귀여운데 물 온도에 예민한 삵이었다. 성은 곧 인간스러운 생각을 접고 집중했다.
이 수상한 온천의 영업은 정말로 초저녁에 끝났다. 물밀 듯이 들어오던 손님들은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고 마지막 청소를 마친 직원들도 하나둘씩 입고 있던 가운을 자신의 캐비닛에 접어둔 채 카운터의 곰에게 인사를 했다. 순식간에 조용한 적막만이 내려앉은 공간에서 퇴근 준비를 하던 곰이 성에게 여긴 저녁에 쌀쌀하니 맨 윗 층으로 올라가 보라는 말을 건네고 마지막으로 문을 나섰다. 집에는 안 보내준다고 하고 배는 고프니까 일단 올라가 보자. 성은 현대적인 것들과 옛스러운 것들이 잔뜩 섞인 붉은 건물의 계단을 올랐다. 숨을 몰아쉬며 오른 마지막 층엔 커다란 문과 그 문에 달린 조그만 노크 필수!! 종이가 있었다. 귀엽다. 조금 긴장이 풀린 성이 숨을 가볍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곤 문을 두드렸다. 한 1분쯤 기다렸을까,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그 사이로 홍중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홍중은 놀라지도 않고 방 안으로 성을 당겼다.
방의 공기 중에 퍼진 달콤한 금귤 향.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 성화가 홍중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홍중은 뭔가 말해보라는 듯한 얼굴로 성을 바라봤다. 성은 홍중의 표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고 홍중은 성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이 빼앗은 이름이었다. 성화는 손가락을 뻗어 어느샌가 홍중의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훔쳤다. 사실 네 얼굴을 봤을 때부터 기억이 났어. 성화가 말했다. 성화가 닦아준 홍중의 눈에 다시 한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흘러내렸다.
“울지 마.”
“그럼 닦아 주지를 마.”
오지 말았어야지. 끝까지 모르는 척했어야지. 홍중은 예나 지금이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성화는 그냥 예전과 똑같이 웃었다. 어떤 말도 그 웃음보다 나을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過.
기억나는 가장 오래된 날부터 홍중은 이곳에 있었다. 홍중은 자신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고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산과 동물과 신과 온천. 이곳을 나가 오랫동안 걸어서 산의 틈새를 비집고 나가면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인간을 만난 신의 최후는 다들 비슷했다. 홍중에게는 먹지도 못할 인간보다 중요한 게 많았다. 모두가 머물렀다가 떠나는 온천에서 끝까지 남아 제 자리를 지키는 것. 세는 것이 무의미한 시간 동안 온천을 지켜온 할머니는 홍중에게 말했다. 이 온천이 곧 너의 전부가 될 거야.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다. 온천에는 매일 다른 손님이 왔고 매일 다른 일들이 일어났다. 뜨거운 물과 공기 중에 가득히 번지는 수증기. 홍중은 아직 어렸으나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 만족했다.
할머니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간은 희한한 생물이라 한번 빠져들면 속수무책으로 허우적거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특히 신들은 인간이 주는 자극에 약해. 모든 걸 다 주고도 다 준 줄을 몰라. 그렇게 신은 말라비틀어져 가고, 인간은 결국 떠나지. 홍중은 할머니의 짝이 그렇게 온천을 떠난 것을 알았다.
인간 중에 제일 위험한 인간이 누군지 알아? 신의 세계로 갑자기 떨어진 인간이야. 홍중은 어느 날 제가 매일 앉아서 점심을 먹는 바위 앞에서 성화를 만났다. 홍중은 자신과 비슷한 몸집에 거지꼴을 하고 서럽게 울고 있는 남자아이를 보고 할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인간은 인간 냄새가 난다더니, 정말이었다. 근데 할머니가 말해준 것만큼 역하거나 끔찍하진 않았다. 아이의 몸에선 온천 밖의 넓은 들판에 가득 심긴 귤나무 밭에서 한참을 헤맨 듯 온통 금귤 향이 났다. 홍중은 자신도 모르게 밖에서 먹으려고 들고나온 주먹밥을 내밀었다. 먹어. 아이는 주먹밥을 받곤 홍중과 주먹밥을 번갈아 쳐다봤다.
“너.. 사람 아니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거 안 먹을 거면 나 다시 줘.”
“... 그건 싫어.”
“그럼 먹어. 다 먹을 때까지 옆에 있어 줄 테니까.”
웃기게도 아이는 그 말에 안심한 것처럼 보였다. 아이의 입으로 한입씩 사라지는 주먹밥이 마침내 전부 없어졌을 때 홍중은 아이 옆에서 일어섰다.
“가려고?”
“다 먹었잖아.”
“나 집에 어떻게 가는지 몰라. 엄마아빠를 잃어버려서 찾으려고 계속 걸었는데, 와보니까 여기였어.”
“그래서?”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도와줄 수 있냐니, 여지를 남겨두는 말이었지만 홍중은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표정의 성화에게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 홍중이 대답하자마자 아이는 안도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묻지도 않은 이름을 말하고, 멋쩍지도 않은지 홍중의 손을 잡고 홍중의 나이를 묻고 홍중의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홍중은 전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법은 알지 못했다.
“김홍중 너 사실 어떻게 나가는지 모르지.”
“...”
“그래도 뭐, 괜찮아. 혼자 있는 것보단 덜 무서워. 이렇게 좀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 할머니한테 가자. 할머니는 나가는 길을 알 거야.”
우와, 너 할머니도 있어? 성화는 할머니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도 할머니 보고 싶다. 할머니가 맛있는 거 해주신다는 애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 성화는 지금 자신이 누구를 만나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조잘댔다. 온천에 도착해 말하는 두꺼비와 수달을 보고 뒤로 폭삭 넘어진 주제에 어느새 빙글빙글 뛰어다니며 온천을 구경했다. 잠깐 여기 있어. 홍중은 계단을 올랐다. 평소에는 느릿느릿 올라가던 발걸음이 오늘은 급하고 빨랐다. 신들은 착하지 않으니까, 성화 혼자 오래 두는 것은 위험했다. 얼른, 얼른 가야 해. 홍중은 수천 번 오르고 내리는 동안 한 번도 넘어져 본 적 없는 계단에서 넘어졌다. 그래도 아프지 않았다. 할머니와 자신이 함께 쓰는 꼭대기 방 앞에서 숨을 고르고 두 번 두드리자 안에서 할머니가 홍중을 불렀다. 할머니는 이미 다 아는 눈빛으로 홍중을 바라봤다.
“김홍중,”
“할머니, 밖에 인간이 있어요. 아주 작은 아인데 여기 더 오래 있으면 위험해요. 얼른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야 해요. 할머니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시죠?”
홍중아, 할머니를 똑바로 봐. 정말 저 아이를 혼자 밖으로 돌려보내고 싶니? 할머니의 커다란 두 눈이 홍중을 곧게 마주했다. 홍중은 정말 할머니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돌려보내기 싫어. 그러고 싶지 않아.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만나서 한 게 도대체 뭐가 있다고 벌써 욕심이 생긴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따 귤나무 밭 너머 언덕에 서는 기차를 태워 보내. 내리고 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너도, 그 아이도.”
네 이름을 알려주지는 않았지? 예전에도 말했듯 이름은 소중한 거야. 그건 결국 널 얽어매는 사슬이 된단다. 홍중은 할머니에게 이미 제 이름을 성화에게 말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도망치듯 할머니의 방에서 나와 작은 맹꽁이와 귤을 나눠 먹고 있는 성화를 급하게 일으켜 세운 홍중은 성화의 손을 잡은 채 언덕까지 쉴 새 없이 달렸다. 성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홍중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집에 가는 길을 찾았어.”
“정말?”
“응. 여기서 곧 오는 기차를 타.”
“타면 집에 갈 수 있는 거야?”
“...응.”
“고마워!”
잊지 않을게. 성화는 그렇게 말했다. 성화는 가지 않겠다고, 홍중 옆에 더 있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다. 이건 전부 홍중만의 욕심이었다. 신은 욕심부려선 안 된다. 그렇게 배웠으니까. 홍중은 멀리 기차가 아주 작은 점으로 변할 때까지 그 언덕에 서 있었다. 홍중은 그제서야 후회했다. 단지 아이가 울고 있다고 해서 다가가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평소에 점심을 먹던 바위에 인간 아이가 있다고 해서, 그런 우연을 만났다고 해서 나도 모르게 내 주먹밥을 주고 이름을 알려준 채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홍중은 몰랐다.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들 거라고는 정말로 생각하지 못했다. 인간을 사랑한 신이 다 비참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신들은 너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너무 커다란 마음을 줬다. 아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홍중은 성화의 이름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성..뭐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홍중은 제대로 손해를 본 것이다. 성화는 홍중의 이름을 알지만 홍중은 성화의 이름을 제대로 몰랐으니까. 홍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邈.
굳이 안 가도 되면 가지 마. 안 그래도 되는 거면 그러지 마. 왜 그렇게 쉽게 웃으면서 가겠다고 해. 굳이 웃으면서 떠나서 날 아프게 하려는 이유가 뭐야. 좀 더 있어 줘도 되잖아.
홍중은 말하지 못했다. 그건 시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홍중은 성화를 보고 주르륵 눈물을 흘린 주제에 성화에게 사실은 그냥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 같아서 놀리고 싶었다면서, 집에 안 보내주겠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고. 내일 네가 어릴 때 탔던 기차를 다시 타면 원래 있던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성화는 그 말을 또 믿었다. 우리 어릴 때, 나 여기 왔을 때 그 귤나무 밭이 정말 예뻤는데. 다시 볼 수 있겠다. 성화는 그런 소리를 잘도 했다. 너는 좋겠다. 나도 아무렇지 않고 싶어. 너를 만났던 거 전부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쓸데없는 해프닝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너를 보지 않았던 날의 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여기 가만히 멈춰있고 싶어.
“잘 가.”
“또 너한테 신세 졌네. 그리고 미안해. 기억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괜찮아. 홍중은 성화에게 그렇게 말했다. 홍중은 어느새 기차에 타서 손을 흔드는 성화를 보면서 지켜지지 않을 다짐을 했다. 정말 다음번엔, 정말로 다음번엔 말할 거야. 같이 있어 줄 수 있냐고. 언제든 한번이라도 또 다시 만나면. 귤나무 밭에서 바람이 분다. 홍중의 눈앞이 안개색으로 칠해졌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울컥걸입니다. 우선 이렇게 소중하고 의미 있는 합작에 참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그리고 제 지각에도 따뜻한 답장으로 제가 한 번 더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합작주님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곧 여름이 다가옵니다. 물론 실제로 겪는 여름에는 여러 애로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창작물 속에서의 여름은 왜 그렇게 달콤하고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맛이 날까요. 다가오는 여름과 영화 합작이라는 두 가지 소중한 기회를 만나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소재로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성화와 홍중이의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장 유명한 ost인 언제나 몇 번이라도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어릴 때는 하쿠과 치히로가 그렇게 헤어지는 게 정말 싫었는데 어른이 되고 다시 보니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이 노래가 그렇게 기약 없이 희망차더군요. 언제나 몇 번이라도 다시 만나면 기억할 거라니 그렇게 다정한 말이 어디 있을까요. 처음 써보는 홍중이의 짝사랑과 잘 어울리는 말이라 냉큼 집어다가 넣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k패치 된 홍중이의 현대식 온천도 귀여운 포인트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다시 한번 합작주님의 다정함에 감사드리며, 성화랑 홍중이가 같이 오래 행복했으면 합니다.